MYARTS

  • 작가명 : 김선혁,  stainless steel, steel, urethane painting 120 x 90 x 190c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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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눈앞이 캄캄하다. 어두움의 연속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와 같이 표현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 역시 이와 같은 현실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직시하고자 하는 어둠은 막연한 어둠이 아닌, 빛을 보기 위한 발판 역할로서의 어둠이길 기대한다.
어둠 속에서 미미한 작은 빛에 집중 되듯이, 수많은 화려한 빛에 현혹되기보다는 궁극적이며 원천적인 빛, 즉, ‘진리’의 빛을 찾기 위해 어둠 속에 마음과 몸을 움튼다.
피조물.. 즉, 대자연 안에 속한 미세 존재임을 인식하며 겸허히 진리의 빛에 시선을 옮기고자 한다.

알 수 없는 본능적 믿음으로 시작하는 하나의 진리는 곧 삶의 방향성을 설정해주며 존재의 이유를 끊임없이 느끼게끔 한다. 따라서 나의 작업은 소박한 삶 속에서의 진리 탐구, 그 안의 깨달음, 그리고 심적 변화와 같은 감성, 혹은 영성을 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현재,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가시밭길, 수많은 갈림길 속에서 하나의 빛을 찾아 머뭇거리며 서 있다.”
오늘의 삶 속에서 찾고자 하는 나의 진리적 탐구는 ‘나’란 존재의 의미와 바람직한 삶의 방향, 형태를 정립하고자 하는 자세에서 시작한다. 즉, 끊임없는 존재의 고찰을 통해 현실의 상황과 대면하고 이상적인 삶을 꿈꾸며 진리적 해답을 찾고 정의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시각화 하는 것이 이번 작업의 큰 틀이라 할 수 있다.

존재의 의미를 깨닫기 위한 하나의 일상적 행위로 ‘올려다보는 것’에 주목하는데, 이는 다르게 표현하면 나의 ‘작음’을 깨닫는 행위라 하겠다.
짐작하기조차 힘든 광활한 우주 속, 티끌과도 같은 지구라는 행성 안에, 흔히 말하는 코딱지만한 크기의 대한민국 땅덩어리 안에, 수많은 생명적 움트임 가운데, 나의 작은 꼼지락을 깨닫는 순간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안락함을 통해, 나의 존재를 정의한다.
‘나는 이처럼 작은 존재다.’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새삼 깨닫는 이 소박한 진리는 끊임없는 경쟁, 치열한 전장과 같은 근시안적(myopia) 현실에서 벗어나, 보다 상위의 가치를 상기시킨다. 이는 다시 평안과 위로 속에 이끄는 작은 불빛, 현실에서의 작은 소망을 가시화 하여 보여준다..

20대 후반. 이 시기의 많은 이들이 현실과 이상(혹은 비전)의 갈림길에서 갈등한다. 흔히 현실의 어둠을 인식하고 두려워한다. 두려움은 진리를 가로막는 벽과 같다. 나 역시 이 벽 앞에서 어리바리 할 때가 많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러한 벽과 마주하게 될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다. 이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모든 것의 우선순위, 즉 진리적 가치를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있다.
어둠은 빛을 등지고 앞서서 걷고자 할 때 깊어진다. 빛보다 ‘나’를 낮추고 한 발짝 물러서서 그 빛에 시선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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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평론
뿌리, 삶, 사람

‘나무(木)’는 인간에게 끊임없는 이야깃거리를 준다. 미술사적으로 볼 때 나무를 그린 풍경은 지속적으로 그림에 등장한다. 인간이라면 나무로 대변할 수 있는 자연이 주는 편안함을 물리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자연을 보면서 절대자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김선혁은 스테인레스 스틸을 용접하여 나무 형태를 만든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얼굴을 표현하고 있고, 얼굴 형상과 뿌리 형태가 겹쳐진 선들은 혈관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크리스찬(Christian)인 그는 현 시대 많은 작품들이 자극적이고 음산한 이미지들로 충격을 주는 것과 달리, 작업에 보다 건강하고 영적인 부분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나무를 구체적으로 작업에 도입한 것은 ‘이미테이션 트리(Imitation Tree)’ 시리즈부터다. 많은 금속작품이 주로 용접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어지는데, 대부분 산소나 알곤과 같이 가스를 사용하여 제작된다.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진 금속작품들에서 그는 마치 “인간이 만들어 낸 인위적 양분으로 가짜 생명체를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가스통은 작가의 한계를 나타내는 오브제(object)였고, 그 안에서 인간의 한계를 느꼈다. 이러한 생각들을 정리하여 2008년 ‘찬양하는 나무(Praise Tree)’를 제작했다. 알곤 가스통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나무의 형상을 표현했는데, 얼굴과 나무의 이미지를 겹친 첫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나무 인간 형태는 작가 자신을 나타내기도 하고 절대자(The God)를 향한 보편적 인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꿈의 생명력(Vitality of vision)’(2010)은 이러한 의미들을 구체적으로 나타낸다. 작품은 벽에 부착된 좌대를 뚫고 허공으로 손을 뻗어 튀어나오는 형상을 보여준다. 선으로 구성된 사람이 튀어나온 틈 속에는 꿈과 생명력을 상징하는 빛이 스며 나온다. 그런데 작가는 의도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작업 과정에서 더 큰 생명력을 강하게 느꼈다. 작가는 ‘꿈의 생명력’의 인체 모양을 용접하기 위해 석고 틀을 만들었다. 이 석고 틀 위 용접한 주변에 혈흔처럼 그을린 자국들이 남는다. 마치 드로잉과 같은 우연한 흔적은 석고 표면에 번져 피, 혈관을 떠올리게 하고 강한 생명력으로 표출 돼 보여졌다.

통합된 의미를 가진 신체

김선혁은 외국 작가 중에서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 1950~)와 록시 페인(Roxy paine, 1960~)에게 영향을 받은 듯 하다. 두 외국 작가의 작품은 일면 닮아 있다. 인간과 자연을 주제로 선을 이용하여 이어 붙여가고 공간을 확장해 가는 모습은 형태적으로 유사성을 가진다. 이러한 부분은 김선혁의 나무 혹은 뿌리 형상과도 흡사하다. 김선혁의 작품과 비교하자면 곰리의 작품에서는 인간과 다른 형상을 이중적으로 표현한 점, 록시 페인은 2009년 메트로폴리탄에 전시한 나무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김선혁은 ‘철조’ 라는 방법적인 면에서는 비교할 수 있으나 이 두 작가의 작품과 맥락이 다르다.
나는 김선혁이 석고로 인체 모형을 만들고 그 위에 금속으로 용접해 나가는 작업 과정에서 곰리를 떠올렸다. 곰리의 작업은 여러 가지 제작 형태가 있지만 그 중 석고로 틀을 뜨고 표면에 납을 붙여 만들어 가는 시리즈와 비교할 수 있다. 곰리 만의 독특한 과정인 석고로 ‘실물 뜨기(life casting)’는 사람이나 사물에 직접 석고를 발라 형태를 뜨는 작업을 의미한다. 특별히 곰리의 경우 작가 자신이 틀이 되어 석고를 입혀 형태를 떠낸다. 그 틀 위에 다시 얇은 납 판을 겹쳐 철조 작품을 제작한다. 이 때 석고 틀을 제거하지 않고 그 안에 남도록 하는데, 의미상 납 틀 안에 ‘자신의 신체’가 그대로 들어 있다. 그래서 곰리는 자신의 작업을 말할 때 신체 용기라는 표현을 쓴다. 곰리는 이외에도 선(line)적인 재료를 가지고 인간을 만들거나 분자 구조처럼 단위적 형태를 가지고 제작한다. 형태는 다르지만 곰리가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체가 육체로 나뉘어져 있다는 이원론적 개념이다. 서양에서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적인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고 정신과 육체는 분리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개념들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 하지만 김선혁의 작품은 곰리처럼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는 의미는 아닌 듯 하다.
곰리가 인체를 그릇이라고 표현했던 것과 달리 뿌리 모양 인체는 용기 모양이라기 보다 안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열린 구조이다. 곰리는 모든 작품에서 핵심이 되는 중앙부에 결국 인체 형상이 나타나도록 제작한다. 곰리의 작품이 개방된 형태처럼 보이지만 결국 내부에 상이 맺히도록 의도한다. 그러나 김선혁의 작품은 이러한 구심적인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선으로 인체를 표현했으나 표면적인 형상일뿐 내부는 비어 있다. 이 점을 비교해 볼 때 김선혁의 작품은 인체 안에 ‘담긴’ 정신성을 표현했다기 보다 그 뿌리 모양 인체 자체가 생명인 것이다. 따라서 이원론으로 표현된 ‘정신+인체=인간’ 이 아닌 정신과 형태가 통합된 ‘정신(생명력)=인체=인간’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기독교에서 구약시대에는 예배를 드릴 때 제물을 바치지만 신약시대 이후 하나님께 내 몸을 드려 예배 드리는 상징적 의미의 산 제사의 개념과 비교할 수 있다. 사람이 자신과 스스로 정신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자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김선혁이 이야기 하듯 작품으로 예배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이 개념들이 초기에 보여준 ‘찬양하는 나무’와 함께 ‘속삭임(Whispering)’(2010)에 나타난다. 뿌리는 인간의 모습이지만 담긴 정신성 보다는 형태로 의미를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했듯 정신성 표현에 있어 보다 통합적인 개념을 가진다. 김선혁은 인간의 형상을 의도적으로 차용하지만 오히려 더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작품에서 관람자들이 얼굴 형상보다 선의 모습에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나뭇가지의 선적인 형상들은 그가 좋아하는 다른 작가 록시 페인의 나무 형태 작품과 닮아 있다. ‘꿈의 생명력 Ⅱ(Vitality of VisionⅡ)’(2011)은 그의 나무들을 떠올린다. 물론 이 작품은 록시 페인의 나무들보다 규모나 여러 면에서 다르다. 록시 페인은 주로 실제 나무와 함께 작품을 설치하거나 거대한 공간을 점유하는 크기들을 가진다. 페인의 나무는 얼핏 나무 모양과 매우 비슷하지만 공해나 산업 폐해에 따른 변종 된 모습들을 하고 있다.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그의 작품은 김선혁이 추구하는 긍정적 이미지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페인의 나무에서 느껴지는 것도 생명력, 강인함이다. 그 나무들은 마치 록 앤 롤 음악을 듣는 것 같다. 그와 대조적으로 김선혁의 작품은 시끄럽게 고함치기 보다 고요한 찬양과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나에게 자연이란 절대자의 존재와 찬미로 이어지게 하는 ‘무엇’이다. 광범위한 자연을 다 표현하고 나의 작업으로 보여줄 수만 있다면 평생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식물의 형태를 언급하고 형상화 하면서 감성적인 작품,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이유이다. “ - 2010 작가노트 中 -


아직 그가 좋아하는 작가들과 어깨를 겨루기에는 가야 할 길이 멀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긍정적인 언어들로 더 힘찬 생명력을 영리하게 보여줄 날을 기대해 보자. ‘행복해지는 법Ⅱ(The way to Happiness Ⅱ)’ (2010)와 ‘행복해지는 법Ⅲ (The way to Happiness Ⅲ)’ (2010)에서 보면 조금씩 그가 자신 만의 방법과 언어로 해결점을 찾아가는 것이 드러난다. 자연이라는 주제를 나무, 잎사귀, 빛과 같은 직접적인 모양들로 보여주기 보다 암시와 은유적인 방법으로 정리해 나가고 있다. 얼굴이나 인체 형상들에 대한 해석도 직접적인 표현에서 재해석된 형태들로 진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만의 언어를 개척하는 것이 현시대 작가들의 최대 고민일 것이다. 아직까지는 스스로 많은 선택 사이에 놓여져 있다. 그가 늘 담고 싶은 긍정과 절대자를 향한 마음과 그 밖에 모든 것을 어떻게 조합해 나갈 것인지 궁금하다. 이번 전시는 김선혁의 첫 번째 개인전이다. 시작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부단히 진보하는 그의 작품을 보고 싶다.


이주리|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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